지하철 가천대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쇼핑몰에서 본 듯한 지하 공간이 나온다. 천장에는 파란 하늘이 그려져 있고, 유럽 광장처럼 꾸민 벽면과 기둥 사이로 분수가 솟아오른다. 그 한가운데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빨간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학생이 왕이다.” 예전 식당 벽에 종종 붙어 있던 ‘손님이 왕이다’가 떠오르는 문구다.
지하철 가천대역 1번 출구 앞 분수 광장에는 '학생이 왕이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왜 이런 현수막을 학교 정문이나 다름없는 곳에 붙여놨을까. 이길여 총장에게 물었다. “우리 학교는 너희를 왕으로 모실 테니, 너희는 왕답게 리더가 되라는 의미를 전하고 싶었어요. 조금 ‘오버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학생들이 어려서부터 내가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고 싶었죠.”
이 총장을 오래 만나온 사람들은 이런 방법이 그만의 소통법이라고 말한다. 뇌리에 박힐 정도로 긍정적인 얘기를 계속해 준다는 것이다.
92세 현역 최고령 대학 총장인 그는 증손자뻘인 학생들 사이에서도 여전한 인기를 누린다. 캠퍼스에서 만난 학생들이 같이 사진 찍자며 달려올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다. 젊은이들도 느끼는 이길여의 인간적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학교 인수하자마자 교실 책상부터 바꾼 이유
1998년 경원대를 인수한 이 총장이 학교에 들어와서 처음 바꾼 것은 책걸상이었다. 교실을 둘러보다 책상을 만졌는데, 가시가 손에 박힐 정도로 낡은 상태였다. 그는 곧바로 여러 공장에서 만든 의자 수십 개를 구해 총장실 앞에 늘어놓도록 했다. 그리고 지나가는 학생들이 직접 앉아보고 좋은 의자에 스티커를 붙여 투표하도록 했다. 학생들 스스로 원하는 의자를 고르도록 한 것이다. 이 총장은 “학생이 스스로 왕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려면 의자, 책상부터 좋아야 하지 않겠느냐. 가격 차이가 나더라도 학생한테는 아끼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가천대 캠퍼스 내를 돌아다니는 소형 전기 버스 '무당이'. 이 총장은 "학생들이 오르막길을 올라오는 게 안쓰러워 보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예전 미국 출장길에서 본 무당벌레 모양 엘리베이터가 기억에 남아 무당벌레 버스를 만들었다. 사진 가천대
‘학생이 우선’이라는 원칙은 이 총장이 빠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2년 하와이 글로벌센터를 세운 일이다. 하와이에 방문한 이 총장은 해변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중국 학생들을 보고는 ‘우리 학생들도 오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곧바로 한국에 연락해 캠퍼스를 세울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고, 직접 2주간 발품을 팔아 하와이 부동산을 보러 다녔다. 그 자리에서 해변의 오래된 호텔 건물을 계약하고 1년 만에 리노베이션까지 마쳤다. 이후 글로벌센터는 가천대 학생들이 한 달씩 어학연수를 하는 곳으로 지금까지 활용되고 있다.
최미리 수석부총장은 “총장님은 평소 생활은 굉장히 검소한데, 수십·수백억이 드는 일은 무섭게 빨리 결정할 때가 있다. 우리는 교수나 의사 입장도 고려해야 하고 고민할 것이 많은데, 이분은 ‘학생·환자에게 도움 되나’ 이것만 생각하니까 결정이 쉬운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뽑은 ‘가천 매력’ 1위는 ‘이길여’
이렇다 보니 학생들 사이에서 이 총장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다. 지난해 가천대는 대학의 자랑거리를 뽑는다는 취지로 ‘가천 매력 TOP 10’ 후보를 선정하고, 축제 기간에 학생 투표를 진행했다. 투표 결과 ‘이길여 총장’이 압도적인 1위였다. 2022년엔 총장을 캐릭터화한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무료 배포해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수도권의 한 대학 관계자는 “요즘 학생들은 총장 이름조차 모르는 게 당연하다. 총장이 대학 브랜드가 될 수 있는 건 가천대가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천대 유튜브 채널에서 만든 10대 매력 후보 소개 영상. TV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을 패러디한 영상이다. 축제 기간 진행한 투표에서 이 총장은 압도적인 '가천 매력' 1위로 뽑혔다.
이 총장에게 그 인기의 비결을 물었더니 “사랑을 주니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대학을 처음 인수했을 당시 일화를 얘기했다.
“예전에 한 교수가 학생들한테 ‘너희들이 공부를 못해서 서울대 못 가고 여기 왔다’는 실언을 한 적이 있어요. 내가 그 얘기를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학생에게 상처 주지 말라는 조항을 학교 정관에 넣으려고도 했어요. 교수라면 우리 학교가 최고고, 너희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해야죠. 나는 자식이 없어봐서 모르지만, 우리 학생들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아요.”
‘나를 가장 믿어준다’ 착각하게 하는 리더
이 총장의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취재진이 가장 자주 들었던 얘기는 그의 ‘매력’이었다. 함께 일하는 의사나 교수들 대부분이 이 총장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태훈 길병원 의료원장은 이 총장이 주변 사람의 호감을 얻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고 말한다.
“총장님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누구든 ‘총장이 나를 제일 신임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어요. 총장이 나를 가장 믿는다고 생각하니까 신이 나서 일하게 되고 더 잘 보이고 싶어지죠. 보상이나 승진을 바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인간적으로 매료돼서 그렇게 돼요.”
최미리 부총장은 그런 호감을 얻는 소통법이 이 총장의 ‘리액션’에서 나온다고 본다.
“좀 허황된 아이디어를 얘기해도 ‘너무 좋은 아이디어다. 왜 그걸 지금 얘기하느냐’면서 긍정적인 리액션을 해줘요. 당장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어도 어떻게든 되는 방향으로 만들어주려고 하고요. 그런 반응을 보면 더 성과를 내려고 경쟁적으로 일 하게 되죠.”
이 총장에게 인간적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물었다. 그는 먼저 애정을 줘야 한다고 답했다. 학생들에게도, 직원들에게도 그의 소통 방법은 ‘먼저 준다’였다.
“내가 (애정을) 먼저 주니까 그래요. 리더는 남들의 고민을 들어주려고 하는 따뜻한 인간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대하면 누구든 느낄 수 있거든요.”
2008년 KAIST는 처음으로 여성에게 명예이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당시 학위를 받은 두 사람이 이길여 총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사진 가천대
하지만 조직을 이끌면서 매번 좋은 리액션만 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윤원중 부총장에게 이 총장이 어떤 식으로 질책하거나 야단치는지 물었더니 “나도 총장님에게 배운 방법인데, 제3자를 활용한 '쿠션'법이 있다”고 말했다.
“면전에 화를 내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직접 얘기하면 아무래도 감정이 드러나게 되죠. 그래서 다른 사람을 통해 대신 전달하도록 하시죠. ‘쿠션’을 주는 방법입니다. 서로 잘 아는 사람을 통해 총장님이 하려는 말을 대신 전달받아 보면, 직접 야단을 듣는 것보다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더라고요.”
정치권에서는 한때 세대를 초월해 두루 인기를 얻은 이 총장을 영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 총장은 공직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다.
"책임 있는 사람은 정치도 해야 하지만, 한창 정치를 할 나이에는 눈앞에 죽어가는 환자를 보는 게 더 중요했어요. 그 이후엔 학교를 맡게 되면서 학생을 잘 가르치는 게 더 중요해졌죠. 병원과 학교를 떠날 수 없어서 정치를 못한 것 같아요. "
시리즈 바로보기